쓰고싶은거

위로의 방법

kimZ 2024. 11. 13. 10:10

 위로: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 주거나 슬픔을 달래 줌.

 

 

  다니던 학원을 졸업하고 오랜만에 학원 친구들과 모인 적이 있다. 그 모임에는 외국에서 생활하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한국인 언니도 있었는데 23살에 외국으로 나가 10년을 지내고 학원에 들어오려고 한국에 들어왔다고 했다. 그 언니는 말버릇처럼 한국의 정서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외국에서 오래 살다 들어오니 적응이 되지 않는다고 말이다. 학원을 다닐 때도 그런 말들로 모든 불리한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하던 그 사람이 나는 불편했다. 그래서 졸업 후 모임에서 굳이 만나고 싶지 않던 사람 중 하나였다.    

 나는 결혼 9년 차다. 우리에게는 아직 아이가 없다. 아이를 갖는 게 두려웠고 상황도 여의치 않아서 차일피일 미루던 것이 9년이나 되었다. 그중 1년은 아이를 갖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이었다. 학원을 다니던 시기가 그 시기와 맞물렸고 그 시기 나는 학원에서 배우던 것에도 집중해야 했지만 아이를 갖기 위해서 온 마음을 쓰고 있을 때였다. 매달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여자들의 그날이 오면 절망과 싸우며 공부해야 하던 때 그 언니는 나에게 이런 위로를 건넸다. "내가 촉이 좋잖아, 점 보러 갔는데도 그렇게 말하더라. 그래서 하는 말인데 너는 그냥 아기 낳을 생각하지 말고 일해! " 그때 나는 잘 쌓아가던 커리어를 접고 아이를 낳고도 할 수 있을 일을 찾아 그 학원에 갔을 때였다. 그 말은 곧 내 마음에 저주처럼 각인되었다. 무례하다고 할 수도 없는 그 해맑음이 그저 무신경에서 나 온 그 말이 우리 관계의 무게라고 느껴졌다. 그 후 아이는 쉽게 우리에게 오지 않았고 포기할 때쯤 우리를 찾아왔던 천사는 아주 잠시 머물다 하늘로 다시 돌아갔다. 그 순간 그 언니의 말이 떠오른 건 왜였을까? 

  나는 살면서 진정한 위로가 필요한 순간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가끔 던져지는 '무신경하거나 무례한 위로'에도 크게 마음을 쓰지 않았다. 그저 나는 함부로 위로라는 말의 칼날을 휘두르지 말아야지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간절한 것이 생기고 그것이 내 삶의 전반을 쏟을 정도로 집중하는 것이 생기자 위로라는 말의 무례, 혹은 참견 나쁘게는 저주처럼 들리는 그것을 넘기는 것이 참 어려웠다. 나의 천사가 잠시 머물다 간 내 몸은 조금 더디게 회복이 되었다. 그래도 착실하게 임신 이전의 몸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몸이 회복된다고 마음의 회복되는 건 아니었다.

  사실 아이를 갖기 싫다고 생각했던 가장 큰 계기는 엄마와 나의 관계 때문이었다. 엄마는 어릴 때 다른 남자를 만나 나를 두고 집을 나갔다. 그렇다고 아빠가 나를 잘 돌봐줬던 것도 아니었다. 부모님이 나에게 온전한 사랑을 주었던 기억은 없다. 항상 그들은 다른 이의 편이었고 자기 자신의 편이었다. 나를 옹호해주었거나 나를 먼저 위해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가족 관계를 겪으며 아이를 낳아서 잘 키울 수 있을지, 나의 결핍이 그 아이의 결핍으로 키워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두려웠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남편과 살 수록 나의 결핍은 해소되어 갔다. 그러자 아이가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과의 관계도 어느 정도 회복 되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아이를 갖고 잃었을 때에도 엄마가 나에게 지금 필요한 정서적 위로를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당연히 엄마가 나의 마음을 채워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아이를 낳았다면 내 아이를 내가 키웠다면 당연히 그렇게 했을 테니까. 그러나 엄마는 언제나 그랬듯이 나의 편은 아니었다. 내 전화에 다짜고짜 화를 내며 내 말을 듣지 않고 말들을 쏟아냈다. "속상해서 그래! 엄마는 너 생각만 한단 말이야, 엄마가 예전에 그렇게 한 건 다 이유가 있었어. 그렇다고 너가 계속 엄마 말을 안 듣고 떽떽거리잖아! 언제까지 그렇게 받아줘야 해! 지금 수술하고 몸이 홀가분하다고 막 돌아다니지 말라고! 그러니까 엄마 말을 좀 들었어야지!" 어떤 말들이 많았던 거 같다. 그러나 나의 마음에 남은 건 "홀가분하다." (거추장스럽지 아니하고 가볍고 편안하다.) 그 날의 대화는 나의 첫 아이를 슬픔 속에 보내줘야 했던 당일이었다. 그건 진짜 나의 괴로움을 덜어주고 나의 슬픔을 달래주는 말이었을까?  

  말은 누군가에게 전해지면 결코 다시 회수 할 수 없다. 바라건대 나는 위로라는 포장지로 참견하고 훈수 두고 싶은 마음을 가리지 않기를 바란다. 누군가 그 말을 듣고 그건 위로가 아니라고 말할 때, 예민하다고 받아치지 않기를 바란다. 받는 사람이 위로라 느끼지 못한다면 그건 괴로움을 덜어주는 말이 아닌 더해주는 말이라는 것을 인정하길 바란다. 그저 무신경함으로 무례함을 저지르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