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고싶은거

보다 낫지 않다.

kimZ 2025. 1. 8. 16:47

 

  나는 자주 스스로 질문한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 '그냥 이렇게 살다가 죽어도 나는 괜찮은가?' 이런 고민은 나를 살아 움직이게한다. 동시에 나를 가장 좌절하게 만드는 질문이다. 그 물음은 질문하려고 노력해서 질문하고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꼭 누군가 내 머리 속에 그리고 마음속에 속삭이는 것 같다. 언제나 나에게 던져지는 그 물음은 잔잔해 보이는 호수에 던져지는 돌과도 같다. 잔잔해 보이는 호수 속에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살아가는지 모르고 눈 먼 돌을 던져 무언가에 상처 입히는 그런 돌 말이다. 그 질문은 나를 알기 위해 던져진 것이지만  결국은 나의 어떤 부분을 죽인다. 어떤 부분이었을까? 이미 돌맹이에 얻어 맞고 사라진 그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나는 아팠다. 무엇이 맞았는지도 모르고 아팠다. 그래서 무언가 맞았구나하고 아는 것이다.  

 

  그래도 그 아픔으로 예상해보자면, 나의 열심인 부분이 맞아 없어진 것은 아닐까? 열심히 앞으로 나아가던 내가 맞아서 사라진 것은 아닐까?  돌맹이가 나에게 부딪힐 때면 나는 항상 홀로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전혀 나아가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매번 같은 고민에 부딪히기 때문이었다. 그 고민의 끝은 항상 무언가 배우는 것으로 끝이 났다. 배우는 것으로 앞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했다. 일상과 다르고 생업과 다른 것을 배우는 것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의 삶은 그것의 반복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배우고나면 그것으로 무언가 해내지 못했다. 열매를 맺지 못했다. 배운 것이 딱히 나에게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또 다시 머물러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주 깊은, 호수보다 깊은 어딘가로 묵직하게 떨어지는 기분을 느끼곤 했다. 

 

  그리고 나면 스스로를 남들과 비교하게 됬다. 내 나이쯤 되면 다들 한 분야에서 적어도 8-10년은 일을 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곳에서 팀장이 되기고 하고 실장이 되기도 했다. 그런 직급이 부러웠다. 나는 만년 사원인게 운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럴 때는 더욱 다른 직업을 갖고 싶었다. 웃기게도 그런 마음으로 새로운 것을 시작하면 그것을 배울 때마다 내 주변 사람들은 벌써 집도 있고 차도 있고 애기도 있고 여행도 잘만 다니는데 나는 왜 정착하지 못하고 새로운 것에 돈을 쏟을까? 나도 꾸준히 돈을 벌었으면 지금 잘하고 살텐데 그런 생각으로 새로운 길을 나선 스스로를 자책을 했다.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비교로 시작한 우울은 끝이 없었다. 아이러니하게 그런 상황에서 나를 지키는 방법 또한 비교였다. 비교에서 온 답답함과 참담함 그리고 속상함과 자괴감을 나보다 덜 가진 사람들과 비교했다. '그래도 내가 저런 사람들보다는 낫지.' 

 

  어떤 깨달음은 생각보다 평범하게 찾아온다. 혹은 고민의 총량이 다 채워졌을 때 불현 듯 답을 준다. 어제의 나의 경험이 그랫듯 말이다. 세상의 많은 고통을 보며 그래도 우린 건강해서 다행이다. 그래도 우린 그 사람들보다 낫다. 그런 생각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또 하찮고 옹졸한 자기 위로 밖에 안된다는 것을 갑작스럽게 인지하게 되었다. 그 순간 더한 죄를 짓지 않게 해준 하나님께 감사했다. 

 

   '보다 낫다.' 그런 말로는 나를 채울 수는 없다. 누군가의 고통을 위안 삼는 파렴치한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가벼운 위안은 다른 이들의 끝을 알 수 없는 고통의 무게를 나의 말 한 마디로 종잇장처럼 가볍게 만들어버리는 무심한 발언이었다.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가볍게 쓸 수 있는 위로가 아니었다. 무심했던 나를 반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