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16. 23:00ㆍ쓰고싶은거
우울을 대하는 자세
모 아니면 도라는 말로 모든 걸 정의 내릴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나는 간혹 내가 느끼는 감정을 어떻게 정의 내릴 수가 없을 때가 있다. 어릴 때부터 종종 출처 모를 우울감에 사로잡힐 때가 있었는데 그게 지금까지도 이어진다. 어릴 때는 그런 감정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그저 울기만 했다. 그러다 대학생이 되었을 때 알랭드 보통의 '불안'이라는 책을 읽으며 내 우울감이 '어떤 불안감'에서 온 다는 것을 어렴풋이 인지하게 되었다. 그 불안이라는 것은 나에게 두려움을 심어주었고 그 두려움은 불안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그렇게 고이게 되는 감정은 다시 나를 불안하게 만들고 그것을 해결할 방법을 모르던 나는 불규칙적이고 갑작스러운 우울감에 빠져 다시 불안하게 되는 불안의 고리에 갇히게 되었다.
사람이 무언가 깨닫는 순간은 소설처럼 대단한 기연이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나의 삶 속의 모든 깨달음은 일상에서 왔다. 일상 속에서 흔히 지나치던 것이 어느 날은 눈에 밟힐 수 있고 여러 번 읽던 책의 단어 하나가 깨달음의 순간을 허락할 수도 있다. 알랭드 보통의 책이 나에게 그랬다. 그저 독서 모임에서 유행처럼 읽던 책에서 '불안'이라는 단어 하나가 나에게 감정을 마주하는 방법을 깨닫게 해 준 것이다.
알고 보니 내가 느끼는 '불안'은 허무에서 오는 것이었다. 어떤 순간 갑자기 나의 존재가 무가치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 어떤 미래도 찬란하게 그릴 수 없을 때 불안이 찾아온다. 내가 과연 억지로 주어진 이 인생을 후회 없이 마무리할 수 있을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라는 내 실존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게 되는 순간이 나의 불안의 시작점이었다. 불안의 실체를 알게 되고 우울의 이유를 마주하자 거짓말처럼 그것은 더 이상 나에게 위협적이지 않았다. 나를 힘들게 하던 그 감정은 아직 실체가 없는 고민일 뿐이었다.
불안의 실체를 깨달았다고 그 감정이 찾아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우울은 내 마음속에 항상 숨어 있었고 호시탐탐 나를 잡아먹을 수 있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적절한 때에 나를 덮치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그 감정을 피하지 않고 그 감정에 흠뻑 젖어들었다. 그리고 왜 이런 감정이 오는지 그 씨앗을 찾아 마주했다. 우울하던 감정은 내가 그 씨앗을 찾아내고 마주하면 곧바로 꼬리를 말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렇다고 그것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 불안은 내가 사는 날 동안 함께 해야 하는 것임을 인정한다. 그저 바라는 것은 어느 날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슬픔이 나를 찾아온 다면 습관처럼 그 슬픔을 마주하고 충분히 그 감정을 느끼고 다시 살아가길 바란다.
거창하게 나의 불안에 대해, 그리고 우울과 그것들을 이겨내는 방법에 대해 써내려 갔지만 오늘의 글은 사실 힘들었다는 투정과도 같다. 오늘도 힘들었다. 오늘도 불안했고 오늘도 우울했다. 실체를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 없는 불안한 마음 때문에 짜증 났다는 그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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